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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과 우리글로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한 큰 스승 주시경 선생
파일없음  nofile   2019-10-07 801
오늘날 우리는 매일 거리나 지하철, 학교, 집, 마트 등의 생활공간에서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을 통해 한글을 읽고, 쓰고, 보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현대의 한글은 단순한 문자를 뛰어넘어 문화 전반으로 생활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나 한글이 우리말과 글로써 오늘날의 지위를 갖게 되기까지는 참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한글이 조선의 공식 문자로 선언된 것은 1894년이다. 1907년에는 국립 한글 연구 기관인 ‘국문 연구소’가 설립되어 우리말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3년 만인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우리말과 한글의 사용이 금지됐다.

국어학자들과 국어 연구 단체들은 일제 치하에서도 우리말과 한글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학자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글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특히 주시경 선생과 그의 제자들은 조선어학회를 창립하여 우리말과 글을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이들이 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우리말과 글의 규범을 세운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주시경 선생은 1876년 황해북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양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고 19살에 배재학당 만국지지과에 입학했다. 스물 세 살 되던 1989년 9월에 만국지지과를 조업하고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했다. 그는 당시 지지학 교사 서재필 박사에게 총애를 받았고 이로 인해 ‘독립신문사’의 회계 겸 교보원으로 채용되게 된다. 이 일은 주시경 선생이 늘 생각해 온 한글 연구의 좋은 기회가 됐다. 일이 없는 시간에 그는 한글 연구를 했다. 주시경 선생의 제자인 국어학자 김윤경 교수(한양대, 1894~1969)는 ‘주시경 선생 전기’에서 “선생은 배재학당 재학 당시부터 한글 연구를 위해 국문 동식회를 조직하고 문서나 책자를 박을 때에 순 한글로 하기를 권장했다”며 “인쇄소에서 박아 내는 ‘협성회보’나 ‘독립신문’은 모두 순한글로 인쇄되었는데 선생이 이 신문들을 모두 교정하였다”고 회고했다.

주시경 선생은 1907년 서울의 상동 청년학원에 개설된 하기국어강습소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많은 사람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학교를 돌아다닌 선생은 ‘주보따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큰 보따리에 교재를 싸서 옆에 끼고 다니던 모습 때문이다. 그의 열정적인 교육 덕분에 수많은 걸출한 제자들이 배출됐고, 제자들은 그의 정신을 기리며 한글 연구와 한글 발전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장지영 교수(서울대, 1887~1976)는 1930년 조선일보에 기재한 글을 보면 주시경 선생이 남긴 자취가 얼마나 큰 것인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 어른이 서울 남쪽인 창골 구석 게딱지같은 오막살이집 캄캄한 방 속에 들어앉아 당신의 손으로 책을 베끼어 가면서 연구를 하고 상동청년학원 한 모퉁이를 빌려서 ‘국어강습소’라는 조그마한 문패를 붙이고 ㄱㄴㄷㄹ을 부르짖을 때에는 남들은 그의 마음의 쓰라림과 아픔을 조금도 알아줌이 없이 도리어 ‘쓸데없는 짓을 한다. 미친사람이다’ 이처럼 웃고 흉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의 생각한 바는 차차 이루게 되어 한글은 그가 터 닦은 대로 바로잡혀 가는 중에 있다. 이 어른은 우리라는 터 위에서 우리가 이 글을 독립적 문자로 쓰기에 맞는 글을 닦아 세우느라고 힘을 쓰신 것이다. 나는 감히 이 어른을 가리켜 세종대왕 이후 한 사람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주시경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최초의 국어사전 원고 ‘말모이’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주시경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최초의 국어사전 원고 ‘말모이’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한글’이라는 이름이 있기 전에는 한글 창제 당시 세종대왕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이라고 했고,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지식층으로부터 경시되며 ‘언문’ 또는 ‘언서’로 불리거나 여성들이 배우는 글이라는 뜻의 ‘암클’, 어린이들이 배우는 글이라는 뜻의 ‘아햇글’로 불렸다.

한글이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10년 전 1910년 경으로 추정된다. 주시경 선생은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은 작명부로 잘 알려져 있다. 주 선생 외에도 최남선 선생이 한글의 작명부로 거론되기도 하나 김윤경 이윤재, 최현배, 고영근 등의 학자들이 ‘한글’의 작명부로 주시경 선생을 지목하면서 이 설이 가장 유력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다. ‘한글’에는 ‘한 나라의 큰 글’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주시경 선생은 한글이 민족 정체성의 바탕을 이룬다는 인식을 같이 하고 우리말과 글을 체계화 하는데 힘을 쏟았다.

주시경 선생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꼽으라면 ‘말모이’를 빼놓을 수 없다. 최근 같은 제목의 영화가 상영되면서 이 다시 알려지기도 했다. 1911년부터 주시경 선생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최초의 국어사전 원고 ‘말모이’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914년 주시경 선생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말모이’는 출간되지 못했지만 이후 조선어사전편찬회로 이어져 우리말 사전 편찬의 기틀이 됐다. 선생의 제자이자 조선어연구회 창립회원이었던 권덕규 선생(1891~1950)은 ‘주시경 선생 유고’에서 “세상의 온갖 다른 일이나 재물 따위를 모두 국어 연구 앞에 희생한 것과 같이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국어연구에 힘썼다. 이는 그의 일상을 아는 사람이 특별히 경탄하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제자인 가람 이병기 교수(전북대, 1891~1968)도 “온 누리 컴컴하고 바람도 사나운데, 꺼지는 그 등불을 다시 밝혀 손에 들고 그 밤에 엄궂은 길에 앞을 서서 가셨다”고 회고 했다.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은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여 국어 연구를 본격화 했다. 조선어연구회를 이은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및 표준어 정리, 국어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연구활동을 펴였다.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부터 이듬해까지 총 33명의 회원들이 투옥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이후, 학회 회원들이 석방되면서 연구 활동을 다시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한글학회로 이어졌다.

말모이 원고. 1914년 주시경 선생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말모이’는 출간되지 못했지만 이후 조선어사전편찬회로 이어져 우리말 사전 편찬의 기틀이 됐다.

말모이 원고. 1914년 주시경 선생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말모이’는 출간되지 못했지만 이후 조선어사전편찬회로 이어져 우리말 사전 편찬의 기틀이 됐다.

주시경 선생이 처음 기독교를 접한 것은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부터다. 1900년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면서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된 그는 선교사 어학선생으로 생활하게 된다. 그는 정동교회에 출석하면서 1902년 정동교회 월은청년회 인제국장 등 임원으로 활약하면서 기독교 선교사업에 깊이 참여했다.

1904년에는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부임했는데 당시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회에는 전덕기를 중심으로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결집해 있었다. 그는 청년학원 설립 당시부터 교사로 봉직했고, 이후 전덕기 목사와 시작된 교분은 그의 별세 때까지 지속됐다. 이 무렵 소외계층인 민중과 민족에 대한 그의 관심은 한글계몽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심화됐다.

“그는 별세할 때까지 상동청년학원, 공옥학교, 배재학교, 이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 학교 교사로 꾸준히 활동하였으며, 그의 장례식 또한 상동교회에서 거행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는 마지막까지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교회건강연구원장 이효상 목사는 “주시경 선생의 선구자적 한글사랑과 사회 계몽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신앙심과 더불어 실천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그에게 있어 한글은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였고, 나라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을지 모른다”고 전했다.



기독교연합신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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